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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어디서나 황당했지만 이 내전은 좀 극심했다. 제대로 된 장비도 갖추지 못한 채 전선에 배치된 거지 근방 군인들 가운데 가식적인 의례 훈련만 받은 채 반세기 전에 만들어진 낡은 소총을 장전할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짜 적을 거의 볼 수 없는 것은 저쪽의 파시스트들이 아니라 밤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였다.

민주주의의 숭고한 대의명분을 믿고 이 대통령의 여정에서 스페인으로 달려온 영국인은 환멸을 느꼈다. 그의 눈에는 한때 식민지에서 경찰로 복무한 적도 있었고, 무기도 없고, 군대도 없고, 사명도 없는 우용군의 전우들이 그저 옹기종기 모여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 밤, 공기총으로 무장한 20명의 소년병만이 우리의 위치를 쓸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빨래방망이를 든 여자 20명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물론 아무리 작든 작든 자유와 평등에 바탕을 둔 군대가 공포와 강요에 바탕을 둔 파시스트 병사들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명분은 전장의 부조리를 줄이지 않았다. 누구의 말처럼 전쟁이 아니라 때때로 사람이 죽는 코미디였다. 그의 전선에는 전투 같은 전투가 없었다. 나중에 자신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그는 적이든 동맹이든 누군가를 올바르게 쏘는 것은 그야말로 드물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1937년 5월 20일 사건은 매우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새벽 5시쯤 다리를 든 영국인이 보초 교대용 참호에서 몸을 일으켰다. 186cm의 키 때문인지 적은 그의 목을 관통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폭발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았어. 여기저기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섬광이 번쩍였다. 나는 큰 충격을 느꼈다. 고통은 없었다. 그저 아주 격렬한 충격을 느꼈을 뿐이야. 총알은 다행히 동맥을 빠져나와 생활에 지장이 없었고 성대 한 개가 부러졌으나 곧 음성이 회복되었다.


이 영국인의 이름은 에릭 블레어였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파리의 같은 호텔에 묵고 있던 미국인 작가를 찾아가 여러 번 무시당했던 것이다. 내 이름은 에릭 블레어야. 그 영국인은 미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대체 뭐야? 퉁명스러운 대답에 움찔하며 영국인은 재빨리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을 밝혔다. 그리고 그것은 조지 오웰이라고도 불린다. 그제서야 미국의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놀라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오, 젠장, 그럼 승낙하겠지. 

에릭 아서 블레어는 1903년 6월 25일 인도 벵골의 모티하리에서 영국 식민지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벵골 정부 때 아편 전시국의 하급관료였던 그의 아버지는 제국주의의 가장 추악한 면을 상징하는 인물로, 아들과의 관계가 순탄치 않았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영국에 온 에릭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즐긴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성생활 동안 공부를 잘했다. 시프리언즈의 초등학교 시절, 억압적인 학교 생활은 그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1917년 이튼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지만, 이때부터 성적은 최하위권이다.

1921년 이튼을 졸업한 에릭은 대학을 포기하고 인도 제국경찰청에 들어가 버마에서 그 일을 맡았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그의 타고난 모험주의와 방랑 습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식민지 경찰이 보수가 좋고 안정된 직업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에릭은 자신의 삶에 만족하기는커녕 제국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줄였고, 그 이후 누구보다도 그 환상을 씁쓸하게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6년 뒤 경찰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집필에 나섰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파리로 이사했지만 안정된 직장을 구하지 못한 그는 노숙자와 식기세척기 등 밑바닥 생활에서 잠시 쓰라린 맛을 경험한다.


영국으로 돌아온 에릭 블레어는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으로 소설 파리 앤 런던의 지하생활로 주목을 받았다. 이후 방송국 직원, 중등학교 교사, 중고서점 직원, 가게 주인 등 다른 직업들 가운데 꾸준히 소설, 평론, 수필을 출판하였다. 우리에게 오웰은 소설가로서 유명하지만, 사실 그의 재능은 오히려 에세이 쪽에 더 잘 나타나 있었다. 그의 대표작인 동물농장과 1984년 역시 전통적인 소설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비평과 풍자로 호평을 받은 작품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기 작가 마이클 셸던도 오웰이 위대한 소설가는 아니었지만 산문 작가로서의 그의 천재성을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1936년 오웰은 스페인 내전 발발 소식을 듣고 아내와 함께 스페인으로 건너가 조선노동당 산하 미군에 입대했다. 당의 행동 대열에 동조하기보다는 파시즘과의 싸움의 원인이 똑같다고 생각하고, 어디에 있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했다. 그러나 당시 스페인에서는 좌익 세력 사이에 심각한 마찰이 있었고, 소련이 장악하고 있던 스페인 공산당은 끊임없이 연합 노동당을 깎아내리고 억압하려 하고 있었다. 오웰이 총상을 입고 후방으로 돌아온 직후, 조선노동당이 마침내 불법화되면서 관련자들의 체포가 시작된다. 아내와 함께 간신히 스페인을 탈출한 오웰은 논란이 되고 있는 카탈로니아 찬송가를 선보이고, 그의 군대 경험담과 스페인 공산당에 대한 고발도 함께 할 것이다.


스페인 내전 경험은 오웰의 경력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인식도 높아졌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에서는 소련에 대한 비판이 잠잠해졌다. 소련은 연합군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사회 전반에 걸쳐 가능한 한 동맹국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 오웰은 이것에 의해 수그러들지 않았고, 서구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소련의 신화의 부정적인 영향에 맞서 싸우려고 노력했다. 독특한 풍자와 비판 정신이 최고조로 떠오른 걸작 동물농장, 1984년은 엄청난 성공으로 명성을 확립한다. 그러나 폐결핵이 악화되면서 1950년 1월 21일 46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였다.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자였지만 결코 그 대의에 맹목적으로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 쪽이 오히려 후진적 민주주의나 썩은 제국주의보다는 파시즘의 확산을 막는 데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지지했을 뿐이다. 따라서 오웰은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면서도 언제나 사회주의자의 약점을 지적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한 지점에서 양쪽으로, 따라서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는 비판적인 사고방식을 유지했다. 그래서 그는 프랑코의 파시즘에 맞서 스페인 사람들의 의병이 되었으면서도 자신의 단점과 실패를 간과하지 못한 것이다. 스페인 내전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무엇을 대답할 수 있는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고 나서 오웰은 씁쓸하게 대답한다. 그것은 음식의 낭비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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