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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는 수수께끼의 화가다. 그는 결코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거나 인터뷰한 적이 없으며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완전히 숨겼다. 이것이 그와 그의 그림들을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가? 사망 50년 후 재평가를 받기 시작해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이 되었다.

미술사에서 분리주의나 분리주의를 이야기할 때 자연스럽게 구스타프 클림트를 떠올리게 된다. 예술 방언 중 별파라는 이름만큼 특이한 것은 없다. 단결이 아니라 이념으로 분리를 정착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술의 경우 분리주의가 있을 수 있다. 19세기 후반 클림트를 비롯한 혁신적인 예술가들은 비엔나 예술인 협회의 회원이었지만 보수적이고 권위 있는 중년, 원로 예술가들의 작품을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은 비엔나 미술가 협회와의 분리를 꿈꿨다. 물론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권력은 안정적인 활동을 보장하는 울타리니까. 자신감과 도전이 넘치던 클림트는 정착을 거부하고 공허한 분리군을 결성했다. 1897년 4월 3일 클림트는 그래픽 디자이너 겸 장인 콜로맨 모저, 건축가 오토 바그너,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등과 함께 회장으로 참여하여 빈 예술인 협회에 공식적으로 알리고 작은 창립식을 개최하는 등 그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공허한 별거가 처음은 아니었다. 모나코 분리기는 1892년 독일의 프란츠 폰 슈투치에 의해 설립되었고, 1893년 베를린 분리기는 마르크스 리버만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리파는 클림트라는 거장이 있었고, 그의 제자인 에곤 실레스와 오스카 코코스카 때문에 공허한 분리주의자를 떠올리게 한다. 1897년 비엔나 분리기가 결성되면서 클림트의 작품은 혁신적인 작품으로 탈바꿈했고, 그의 작품 세계는 예술의 도시 비엔나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결국 빈 분리주의자의 등장은 빈이 음악도시에서 예술도시로 이미지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비엔나 분리주의자는 시대의 미술과 예술의 자유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매니어리즘에 빠져 있던 예술인 협회에 맞섰다. 그들은 지금 검열을 통과하려 하지 않고 오직 진실만을 생각하고 그들이 보고 느낀 것을 솔직함으로 그렸다. 빈 분리대 역시 수공예에 대한 비교적 낮은 인지도의 투쟁이었다. 그들은 부자들을 위한 예술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예술과 일치시키고, 감각적인 예술을 추구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술의 모든 영역에서 온 요소들을 이용하여 포괄적인 예술 작품을 창조하고 나아가 사회를 자신의 것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다. 유럽 그룹의 아틀리에에 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기 어렵다. 클림트가 자서전을 쓰거나 인터뷰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을 알아내는 기본은 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는 1862년 7월 14일 비엔나 교외의 바움가르텐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보헤미아 출신의 보석상이자 조각가였다. 물론 아버지의 수공예에 대한 기억은 나중에 금으로 모자이크 작업을 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클림트도 오페라 가수인 어머니로부터 음악에 대한 열정을 물려받았다. 천재 베토벤을 기리는 위대한 작품을 만든 것도 아마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에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클림트의 가족은 유복했지만 1873년의 경제위기 여파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1876년 클림트는 비엔나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883년까지 학교에서의 모자이크 기법과 금속의 사용법, 그리스의 도자기 예술, 이집트와 바빌론의 건축, 슬라브 민속 등 여러 가지 장식 기법을 1883년까지 직접 만들었으며, 이 기술은 이후 다양한 실험의 기초가 되었다. 클림트가 이 시기에 특히 매료된 것은 한스 마카트로 대표되는 사화였다. 역사화는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면서도 섬세한 필치로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장르였다. 특히 예술 애호가이자 빈의 우상인 한스 마카트의 그림은 막연하고 극도로 매혹적이었다.

클림트는 한스 마르카트를 능가할 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1883년 클림트는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 친구 프란츠 마치와 함께 위탁작품을 그렸다. 당시 왕실은 각 지역에 새 건물을 짓거나 보수할 때 실내에서 적절한 그림을 그리곤 했다. 세 명의 예술가는 트란실베니아의 펠레스키 궁전과 한스 마카트 스타일로 헤르스빌라의 침실 등 빈의 저택들을 장식했다. 1886년 클림트는 버크 극장을 장식한 작품인 기념비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1888년에 완공된 옛 버크 극장의 관객석은 각 인물의 상세한 초상화에 경탄했다. 이 작품으로 그들은 황제에게 특별한 훈장인 적십자사 황금종려상을 수여받았고, 그들의 명성은 비엔나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92년 그의 형 에른스트가 죽자 클림트는 망연자실했다. 그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마음이 없었다. 일시 중단은 클림트가 사고의 깊이를 확보하기 위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클림트는 형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며 인간의 운명과 구원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1895년 클림트가 다시 붓을 들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상징주의자였다. 상징과 알레르기를 통해 현실을 풍자하고 인간의 운명을 암시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클림트는 교육부가 의뢰한 비엔나 대학의 강당을 꾸밀 계획이었다. 오랜 계획 끝에 마치와 클림트는 첫 천장 디자인을 제출했다. 마르시는 중앙과 신학부에서 일했고 클림트는 철학, 의학, 법률을 담당했다. 이후 작품이 완성되면 빈의 미술계는 열띤 스캔들에 휘말리게 된다.

클림트는 성격이 강한 예술가였다. 한스 마르카트의 작품에 매료되어 잠시 역사화를 그렸으나, 어쨌든 종합예술로 대표되는 자신의 예술세상으로 가는 과정이었다. 비엔나 예술인 협회의 보수적인 태도에 반감을 느낀 클림트는 1896년 분리주의자들의 기원이 된 요제프 엥겔베르트, 칼 몰과 함께 이 협회를 처음 조직했고, 이듬해 비엔나 분리주의자를 공식 설립했다. 이제 클림트는 비엔나 분리대의 활동에 대비해야 했다. 클림트를 비롯한 분리주의 예술가들은 대규모 전시회를 조직하는 한편 모나코 분리주의자들이 만든 것과 유사한 잡지도 기획했다. 이듬해 비엔나 분리주의 그룹은 최초의 분리주의 전시회를 개최하고 잡지 베르 사쿰을 창간하였다.


1898년 3월 23일, 최초의 분리주의 전시회의 개막식은 단순히 정원회사 건물에서 열렸다. 황제는 개막식 기념식에서 분리주의 화가들이 제대로 된 선을 넘지 않으면 새로운 예술 활동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클림트는 제대로 된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단서가 불편했다. 그는 포스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적절한 선을 넘었다. 포스터에는 젊은 화가를 상징하는 테세우스가 전통 화가를 상징하는 괴물 미노타우르스를 제치고 등장했는데, 문제는 테세우스의 페니스가 노출되었다는 것이었다. 클림트는 그 앞에 나무를 그려 자신의 성기를 가리고 검열을 거쳐 통과시켰었다. 첫 분리주의 전시회는 5만 7천 명의 관람객이 218점의 작품을 방문해 판매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며 막을 내렸다. 이제 클림트의 명성은 하늘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그 해에 분리파가 만들어졌는데, 빈 분리대가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그들만의 공간이었다. 건축가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치가 전시한 이 건물은 오늘날까지도 비엔나의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1902년 제14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분리주의 역사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 전시회는 클림트의 걸작들을 위한 새로운 도전인 천재 음악가 베토벤을 위해 헌정되었다. 요제프 호프만은 전시장 실내장식을 담당했고, 개막식 날 구스타프 말러는 베토벤 9번 교향곡을 모티브로 편곡한 작품을 직접 지휘했다. 그러나 이 전시회의 하이라이트는 무엇보다도 클림트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모티브로 그린 벽화 베토벤 동결이었다. 발가벗은 여자의 고통스런 모습으로 시작되는 이 그림은 악마의 위협적인 공간을 모두 지나가고, 합창하는 여자들 사이에서 두 남녀가 뜨겁게 포옹하고 키스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무절제한 여자들에게 유혹되어 마침내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구원받는 영웅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클림트의 이상향, 사랑을 노래하는 예술과 상징성에 대한 끝없는 갈망, 다양한 기법을 이용한 응용 예술의 절정이었다. 그런데도 관람객들은 난잡함, 오락, 무절제가 특징인 이 작품에 대한 반감을 자아냈고, 그들의 싸늘한 시선은 공허한 분리주의자들의 열정을 얼어붙게 했다.

클림트에게는 또 하나의 시련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비엔나 대학의 천장 도면에 그린 일련의 철학, 의학, 법률 연구 때문이었다. 나체의 벌거벗은 임산부 등 벌거벗은 사람들과 그 혼돈 속에서 무기력하게 방황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클림트는 병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숙명과 삶의 부조리에 대한 불안한 심리를 표현했다.

1903년 법이 완성되었을 때 클림트의 작품은 대학 건물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었다. 클림트는 새로 건립된 현대미술관에서 이 작품들을 전시할 것을 제안받았으나, 이 그림의 원래 목적에 어긋난다며 거절했다. 따라서 클림트는 대중의 고상한 취향에서 벗어나 나체와 성을 대담하게 표현했다. 그의 인기는 식어 버렸고 그는 공허한 탈권위주의자들 안에서 지지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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