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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는 프랑스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과 미국 브랜드 마크 제이콥스를 이끌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복고 패션, 대중문화, 현대미술 등의 문화를 자신의 사상과 디자인 철학으로 읽고 승화시킨 그의 디자인은 단순한 의상과 액세서리를 넘어 하나의 문화로 거듭나고 있다. 마크 제이콥스는 의상은 고상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 팔아야 할 상품이며, 디자인이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고 그 창의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순수 예술가가 아닌 패션 디자이너라고 말한다. 마크 제이콥스는 상류층의 사치와 거리의 천박함 사이를 오가는 넓은 디자인 스펙트럼, 그리고 자신의 순수함을 잃지 않는 천재라는 인간적인 매력으로 전 세계에 많은 팬들을 갖고 있다. 2010년에는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되었으며, 패션 외에도 게이 결혼 지원, 중국과 티베트의 분리 독립 등 사회 이슈에 대해 적극적인 의견을 피력했으며, 화려한 개인 생활로 일거수일투족을 해온 스타 디자이너다.



마크 제이콥스는 1963년 4월 9일 뉴욕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연예계 스타들을 관리하는 윌리엄 모리스 에이전시의 유능한 요원이었는데, 마크 제이콥스가 일곱 살 때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로 마크 제이콥스는 어머니의 세 번의 재혼에서 뉴저지, 롱 아일랜드, 브롱크로 이사하면서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정신병을 앓고 있어 아이들을 돌본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1980년 17세 때 어머니와 형제자매를 떠나 친할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마크 제이콥스의 할머니는 뉴욕 주 어퍼웨스트에 있는 역사적인 건물인 마제스틱에 살고 있는 세련된 여성이다.마크 제이콥스는 잡지 베니티 페어에서 베르그도르프 굿맨, 삭스 피프스 애비뉴, 로드와 테일러, 본위트 텔러에서 쇼핑을 하고 있던 스타일리쉬한 할머니가 그의 인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그에게 개를 가르쳐 줄 뿐 아니라 항상 그를 격려해 주었다고 말했다.

마크 제이콥스의 패션에 대한 열정은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그가 1976년 13살이 되었을 때 그는 가장 아방가르드 옷을 파는 뉴욕의 부티크 샤리바리를 방문하여 돈을 받지 않아도 되었으니 창고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의 소원은 2년 후, 그가 채리바리에서 옷을 정리하고 마네킹 옷을 입히는 일을 맡게 되었을 때 이루어졌다. 평소 동경하던 패션디자이너 페리 엘리스와 이곳에서 직접 만나게 된 것도 행운으로 꼽혔는데, 이 사건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되었다. 페리 엘리스는 디자이너 지망생 마크 제이콥스에게 뉴욕의 파슨스 스쿨에 진학할 것을 권유했고, 마크 제이콥스는 1981년 파슨스 스쿨에 그의 조언을 따랐다. 그가 졸업한 해인 1984년, 그는 올해의 학생, 체스터 와인버그의 황금 뼈, 올해의 황금종려상을 모두 수상하면서 재능 있는 미래 디자이너로 떠올랐다.

마크 제이콥스의 졸업 컬렉션은 영국 예술가 브리짓 라일리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세 개의 선택적 모양의 스웨터로 구성되어 있었다. 할머니가 손수 만든 사다리꼴 스웨터가 그의 패션 사업의 출발점이 되었다. 샤리바리의 주인 바바라 바이저는 마크&바바라에게 제이콥스라는 꼬리표를 달고 그의 꿈 부티크인 샤리바리에서 판매하며 컴백 스웨터를 주문했다. 젊고 재능 있는 디자이너를 찾고 있는 뉴욕의 의류 회사인 루벤 토머스의 로버트 더피에 의해 발견되는 마크 제이콥스는 스케치북이라는 새로운 라인의 디자인을 맡았다. 마크 제이콥스와 로버트 더피는 곧 제이콥스 & 더피라는 작은 회사를 설립했고 1984년부터 시작된 그들의 제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마크 제이콥스의 스케치북 컬렉션은 곧 뉴욕의 패션 언론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1985년 뉴욕타임스는 그의 작품을 신비롭고 청순한 우아함에 1960년대에 활력을 더하는 것으로 묘사하며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에 대한 반항적인 스타일이라고 평했다. 모회사인 루벤 토머스가 문을 닫자 1986년 마크 제이콥스가 그의 이름을 딴 마크 제이콥스 컬렉션을 발표했고, 같은 해 미국 보그는 그를 패션계에서 떠오르는 7명의 스타 중 한 명으로 소개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마크 제이콥스 니트 스웨트는 1985년 스케치북 라인에서 발표된 손 니트 스웨터로 물방울 무늬로 왼쪽 팔의 웃는 얼굴이 유머를 더해준다.

1985년 스케치북 라인용으로 발표된 손 니트 스웨터와 폴카 도트 패턴, 왼팔의 웃는 얼굴이 유머를 더해준다.

그의 신선하고 유머러스한 디자인은 언론의 환영을 받았지만 마크 제이콥스와 그의 사업 파트너 로버트 더피의 움직임은 순탄치 않았다. 이들은 반복된 부도, 투자자들의 절도, 화재 사고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패션업계에서 고군분투했고, 심지어 세관에 묶인 패션쇼 작품과 취소된 쇼까지 잇따라 선보였다. 이러한 노력이 1987년에 결실을 맺은 마크 제이콥스는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회가 수여하는 페리 엘리스 뉴 디자이너상을 수상한 최연소 디자이너가 되었다.

1988년에 마크 제이콥스에게 중요한 기회가 왔다. 그는 로버트 더피와 함께 포스트 창업자 페리 엘리스에게 시달려온 페리 엘리스의 여성복 라인을 이끌었다. 당시 페리 엘리스 브랜드는 랄프 로렌, 캘빈 클라인과 함께 뉴욕의 대표적인 패션 브랜드였다. 25세의 나이에 마크 제이콥스는 연간 매출 1억 달러 이상의 주요 브랜드의 디자이너가 되었다. 1989년, 후에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가 된 톰 포드는 조연 디자이너로 채용되었고, 페리 엘리스 특유의 화려한 색채와 함께 유머러스한 아메리칸 캐주얼 디자인을 발표했다.


마크 제이콥스는 1992년 페리 엘리스의 옛 영광을 뛰어넘는 최신 이슈 모음집을 발표했다. 시애틀 출신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 니르바나와 펄 잼의 음악과 스타일에서 영감을 얻은 1993년 봄/여름 페리 엘리스 컬렉션은 구겨지고 누추한 의상의 향연이었다. 마크 제이콥스는 세인트의 한 중고 가게에서 2달러에 산 낡은 플란넬 체크 셔츠를 보냈다. 마크스 플레이스 투 이탈리아에서 그는 한 상자에 300달러가 넘는 체크 무늬의 최고급 실크 원단을 생산하여 셔츠를 만드는데 사용했다. 또 새틴 소재의 버켄스택 슈즈, 닥터 마틴 건스, 검은 니트 모자, 한쪽에 흘러내리는 대형 스웨터, 싸구려 캐시미어 스웨터, 고급 실크 원단 컨버스 운동화, 그래픽 티셔츠, 찢어진 청바지를 자유롭게 섞어 발표했다. 고품질의 소재로 고급 패션으로 승화된 유물론 시대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좌절과 저항을 대변하는 빈티지 스트리트 패션의 집합체였다. 이 컬렉션은 페리 엘리스의 고귀한 고객들과 경영진, 패션 언론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고, 뉴욕타임스는 이를 엉망진창이라고 비판했다.

페리 엘리스 경영진이 수천 달러짜리 스켈링 체크 셔츠를 사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결정으로 계약금이나 컬렉션이 취소되었고, 마크 제이콥스와 로버트 더피는 바로 해고되었다. 또한 컬렉션은 페리 엘리스의 여성복 라인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크 제이콥스는 1992년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회가 수여한 올해의 여성복 디자이너상을 수상했고, 그 창설자의 칭호와 함께 수상하였다. 이후 마크 제이콥스는 1990년대 반패션 운동을 주도하며 성공적인 여행을 한 뉴욕의 패션계에서 창의적이고 대담한 디자이너로 주목을 받았다.

아마도 마크 제이콥스의 컬렉션은 대중음악과 대중문화에 대한 그의 친숙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뉴욕의 유명한 디스코 클럽 스튜디오 54에 살았던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개인적으로 대중음악과 클럽문화를 경험했다. 윌리엄 모리스의 소속사 사장인 삼촌의 도움으로 뮤지션들과 친해질 기회가 많았고, 이들의 외모는 물론 블론디, 이기팝, 소닉 유스 롤링 스톤스 등 뮤지션들의 음악에 매료됐다. 대중음악과 뮤지션의 감각적인 패션 스타일은 마크 제이콥스의 패션 디자인에 젊음, 활력, 대담함 등 차별화를 더하고 1990년대 젊은이들의 정신을 대표하는 디자이너가 되는 흙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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